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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METHING

Paul Gauguin 폴 고갱

Gauguin at His Easel 1885, Paul Gaugu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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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썹엔 힘이 들어가 있지 않고, 고집스럽게 보였던 코도 정면에 가까운 각도 탓에 부각되지 않고, 턱도 단단해 보이지 않는다. 다른 자화상들에서 보았던 거만한 표정은 찾아볼 수가 없다. 지치고 피곤한 화가가 힘없이 붓을 놀리고 있을 뿐이다.
이젤 앞의 고갱, 한때 내가 제일 좋아했던 고갱의 그림이다.

열악한 상황은 4년 후 코펜하겐에서 극에 달했다. […] 당시 그린 <자화상(이젤 앞의 고갱)>은 그의 절망을 잘 보여준다. […] 앞으로 향한 시선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음을 나타내는데, 그 눈길은 또 다른 경멸의 시선으로 어깨 너머를 바라보는 부끄러운 남자의 눈길로도 보인다(이 그림의 배경이 바로 "다락방에 가서 목매달아야 하는 건 아닐까 매일 자문한다"고 했던 바로 그 다락방이다).
- 반 고흐 VS 폴 고갱 (브래들리 콜린스 저 | 이은희 역 | 다빈치)

고흐에 관심 있던 고등학교 시절 읽었던 책인데, 그 당시 나는 부끄럽게도 고갱을 고흐의 후광을 입은 화가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거만하고 자신에 찬 자화상과, 남국의 강렬한 색채로 그려진 타히티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고흐가 그의 그림을 좋아했던 것을 이해할 수 없었고, 고흐에 대한 책마다 고갱이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아예 책 제목에 그 이름이 나선 이 책이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작은 도서관에서 더는 읽을 책이 없었기에 이것이라도 읽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페이지와 자화상 때문에 그를 싫어했던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불우한 천재 이야기에는 항상 마음이 동한다. 나는 그런 것에 위안을 얻곤 하였다.
요즘 또다시 이 자화상과 이 책의 인용문(다락방에 가서~)이 아른아른해서, 이북을 샀다. 흑백의 화면으로는 삽화를 제대로 감상하지 못할 터지만 -종이책도 어차피 감상에 적합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고-, 고갱의 그림보다 글을 읽고 싶었으므로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책 배송을 기다릴만한 심적 여유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폴 고갱, 슬픈 열대(폴 고갱 저 | 박찬규 역 | 예담). epub 지원되는 책이 이 한 권밖에 없어 별 기대 않고 샀던 것치고는 만족스러웠다. 특히 편집 방식이. 시기를 나누어 간략한 행적, 고갱의 회고록 또는 수필, 서간문으로 구성되어 있고, 역자의 설명은 필요한 만큼만, 의견이나 추측 없이 사실로만 덧붙여졌다. 삽입된 그림들은 예상대로 그저 참고용. 책을 다 읽고 난 지금도 무언가 부족한 느낌이지만, 그의 성품은 내가 오해하고 있던 게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으니, 이것으로 미안함은 접어둘 수 있게 되었다.

http://commons.wikimedia.org/wiki/Category:Paul_Gaugu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