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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

그 애에게서는 물비린내가 났다 흡사 굵은 빗방울이 둔하게 텀벅텀벅 내리 막질 치는 장맛비와도 같은 냄새였다. 참을 수 없이 고약한 냄새는 아니었지만, 코밑을 스멀스멀 간질이는 게 맡기에 썩 유쾌하다고도 할 수 없었으므로, 나는 그 애 가까이 간 일이 없었다. 여덟 살의 3월은 그 애가 아니더라도 이미 새롭고 흥미로운 것들로 가득했다. 굳이 숨을 참는 수고를 들여 아쉬울 것 없는 호의를 얻을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로, 처음 접하는 작은 사회와 그 구성원들을 향한 넘치는 호기심도 그 애 앞에서만큼은 한풀 수그러지는 것 같았다. 갓 국민학교에 입학한 아이들의 들뜬 열기로 어수선했던 교실 분위기가 어느 정도 안정되었을 3월 말경, 매일 아무렇게나 앉던 자리와 짝을 정하기로 한 날이었다. 우리는 자신의 새로운 짝.. 더보기
시간 때우기 잡생각도 많고, 넋 놓고 있을 때도 많고.. 더보기
우산 내 젖어들어 가는 한쪽 어깨를 뻔히 보고서도 고집스럽게 우산을 제 쪽으로 당기던 꽉 그러쥔 손을 못 밀어낼 것도 없었지만, 그런 시늉만 한 채 옷 젖는다고 투덜거리는 데에 그쳤던 것은, 네가 비에 맞을까 걱정해서도, 너에게 속 깊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함도 아니었다. 그저, 조금이라도 우산대가 내 쪽으로 기우는가 싶을 때마다 발까지 동동 굴러가며 안달하던 그 모습, 그 표정이 자꾸 보고 싶어서. 그런 실없는 장난을 치며 다다른 내 집 앞, 우산을 낚아채 나를 안으로 밀어 넣고는 인사할 틈도 없이 넓어진 우산에 기쁜 듯이 가던 네 뒷모습에 조금 서운하기도 했지만, 어쩐지 웃음이 났다. 흠뻑 젖은 외투를 벗어 빗물을 짜내면서도 그 토라진 말투가 떠올라 썩 싫지만은 않았었다. 오늘, 오랜만에 내리는 비에 꺼내 .. 더보기
핑계 안녕하세요, 무슨 이유든 만들어 드립니다, 핑계사무소입니다. 오늘도 고객님의 완벽한 상황 회피를 위해 정성을 다하는 설계사 '위'입니다. 아, 저희 사무소는 처음이시군요. 네, 네. 그런 일은 보통 없지만 실패할 경우 의뢰비의 최대 세 배까지 보상해 드립니다. 첫 의뢰니까 30% 할인 혜택도 받으실 수 있고요. 아하 망설이시는 것도 이해는 합니다. 조금 수상쩍긴 하죠. 그럼 더 생각해 보시고 다시 전화 주세요. 다음 고객님이... 아니라고요? 그럼 일단 호갱님 사정을 들어봐도 되겠습니까? 예? 아니요, 설마요. 잘못 들으셨습니다. 음, 명절에 고향에 가기 싫으시다고요. 요즘 가장 잘 나가는 핑계를 찾고 계시는군요. 이런 때라 구비 되어 있는 게 몇 가지 있긴 하지만, 고객님께는 마땅한 게 없네요. 백수는.. 더보기
외출 구겨지고 땀냄새나는 여름옷은, 색 짙은 가을 겉옷들 사이에서 부끄러이 펄럭였다. 얇은 천 위로 스치는 바람이 차가웠다. 부쩍 나빠진 시력은 어느 것 하나 선명하게 잡아내지 못해 시야는 잔뜩 흐렸고, 내 걸음새도 익숙지 못하고 어딘가 어색했다. 공기는 낯설고, 지나가는 시선 하나하나가 따가웠다. 다른 이들의 평범한 일상 속에, 시간 따라잡지 못한 나 혼자 부자연스러웠다. 이 틈에서 더는 견디어 서 있을 수 없어 곳 갈 데 없는 발걸음을 멈추고, 어디론가 숨어들고만 싶던 그때에, 말끔한 구두가 앞에 섰다. 헤지고 색바랜 내 단화가 더 없이 초라했다. 발가락이 곱아들었다. 햇볕에 닿는 눈꺼풀이 아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리고 반갑고 그리운 얼굴은 조금도 숙여주지 않을 것이었다. 나도 저도 뻣뻣이 굳은 목..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