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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UDE

우산

내 젖어들어 가는 한쪽 어깨를 뻔히 보고서도 고집스럽게 우산을 제 쪽으로 당기던 꽉 그러쥔 손을 못 밀어낼 것도 없었지만, 그런 시늉만 한 채 옷 젖는다고 투덜거리는 데에 그쳤던 것은, 네가 비에 맞을까 걱정해서도, 너에게 속 깊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함도 아니었다. 그저, 조금이라도 우산대가 내 쪽으로 기우는가 싶을 때마다 발까지 동동 굴러가며 안달하던 그 모습, 그 표정이 자꾸 보고 싶어서. 그런 실없는 장난을 치며 다다른 내 집 앞, 우산을 낚아채 나를 안으로 밀어 넣고는 인사할 틈도 없이 넓어진 우산에 기쁜 듯이 가던 네 뒷모습에 조금 서운하기도 했지만, 어쩐지 웃음이 났다. 흠뻑 젖은 외투를 벗어 빗물을 짜내면서도 그 토라진 말투가 떠올라 썩 싫지만은 않았었다.

오늘, 오랜만에 내리는 비에 꺼내 든 우산은, 빗물을 말리지 않고 접어두었던지 녹이 슬어 잘 펼쳐지지 않았다. 애써봐도 손에 녹만 묻어나왔다. 10분, 5분만 일찍 나섰더라도 어떻게든 해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먼저 도착해 조금 기다릴 수도 있는 것을, 나는 매번 나설 채비는 일찌감치 끝내두고도 약속 시각에 아슬아슬하게 미적거리다 집을 나서곤 하였다. 오늘도 그런 탓에, 하릴없이 언젠 가의 소낙비에 샀던 싸구려 우산을 집어 들었다. 안에서 듣기에 경쾌했던 소리와는 달리, 비는 제법 거칠어 얇고 투명한 우산이 못내 미덥지가 못했다.
길 건너, 날씨에 맞지 않게 산뜻한 옷차림의 네가 보인다. 때 놓친 신호등을 한 차례 다시 기다리며 불현듯 이 볼품없는 우산이 원망스러워졌다. 옷도 꽤 젖었다. 손에서는 아까 미처 닦을 생각도 못 한 녹이 빗물에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급한 마음에 아무거나 끼워 신고 나온 신발도 눈에 들어와 아차 싶다. 버리려고 내두었던 밑창이 다 닳은 단화다. 이제야 발밑에 축축이 스민 빗물을 알아차렸다. 굵어지는 빗발과 거세지는 바람에 맥 못 추는 우산 따라 나도 같이 처량해진다.
오늘의 너와 나는, 어울리지 않는다.
마침내 파란불이 들어와, 너는 천진한 얼굴로 손 흔드는데, 나는 아무래도 거기로 갈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