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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UDE

하지

꽃은 때 이르게 피었다 때 늦은 눈바람에 금세 졌다. 언제 어디에서 돋았는지 모를 민들레의 먼지 덩이처럼 날리던 홀씨도 모두 사라지고, 비 온 다음 날이면 길바닥을 노랗게 얼룩이던 송홧가루도 이제 없다. 비가 많이 내렸다. 일렁일렁 피어오르려는 봄기운을 누르고 눌렀다. 연한 하늘빛도 먼지로 빼곡히 희뿌옇게 가려두고서, 그렇게 봄이 지났다. 모르는 새 초록 이파리가 짙어진, 어느덧 여름이다.
지리했던 봄비는 장맛비로 이름을 바꾸었다. 근래에 매일 내리는 소낙비는 한낮의 열기를 식혀줄 것처럼 쏟아붓고는 새벽녘까지 끈덕지게 버틸 습기를 놓아두고 간다. 오늘도, 발바닥이 다 축축해지는 궂은 날씨다. 낯과 목덜미에 흐르지 않는 땀을 펴 바를 듯이, 방 안이 잔뜩 눅눅하다. 나는 뜨거운 빗방울을 가득 머금은 어느 구름 속에 폭 잠겨 있는 것만 같다. 방바닥마저 끈적거리는 날씨에 의지할 것은, 다행히도 아직 서늘한 벽이다. 언젠가 열어둔 창문으로 들어온 빗물이 번진 그 벽에 등을 붙이고 모로 누워, 오전에 전해 들은 고향 집 소식을 곱씹어본다.
특별한 것은 없었다. 감자 캐고 난 자리에 콩을 심었고, 하나둘씩 고개 내미는 새싹을 새들이 쪼아먹는 탓에 종일 밭을 지키는 게 요사이 일과라고 했다. 병아리를 몇 마리 들였는데, 들고양이 하나가 호시탐탐 노리기에 밥그릇을 따로 놔줬더니 아예 눌러앉았다고도 했다. 이번 고양이 이름도 아마 나비일 게다. 삼색 고양이, 줄무늬 고양이, 점박이 고양이, 검은 고양이. 나비가 벌써 몇 마리째인지 모른다. 고향 집에 갈 때마다 다른 나비다. 머무는가 싶다가도 훌쩍훌쩍 떠난단다. 그리고 뉘인지도 모를 과수원집 딸내미 얘기를 또 들었다. 귀농한 노부부의 늦둥이 막내딸이 서글서글 참하다고, 내려오면 자리 한 번 만들어 보겠노라고. 옆집의 점순이도 신랑감을 인사시키러 왔다 갔다며, 고 사납던 계집애가 혼전에 배가 부른 게 창피스러운지 굳이 내 이름을 들먹이며 못 본 체 해달라고 했단다. 너는 대체 언제 신붓감을 보여줄 셈이냐는 성화에 서둘러 전화를 끊었던 터였다.
그래, 특별할 것 없는 안부 전화였다. 괜히 늘어놓은 농사일과 고양이와, 본론이었을 선자리와, 별 뜻 없이 흘린 너의 소식, 모두 평범한 이야깃거리였다.
다만, 저 안쪽에서 꺼끌꺼끌 숱한 모래알이 제각기 기분 나쁘게 꿈틀거리며, 제 닿는 곳마다 갉아댈 뿐이었다. 그리하여 커져가는 텅 빈 공간이 칠흑보다 더 새카맣게 메워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저 견딜 수 없이 숨이 막힐 뿐이었다.